브라질 축구전술의 전환점

브라질 축구가 4-2-4 를 구사하게 된 계기는 ?

53 코파 아메리카 결승에 브라질과 파라과이가 올랐다. 

브라질은 명실상부한 남미 최강의 팀 이었고,  파라과이는 전력이 뒤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때 파라과이는 브라질 대표팀을 어떻게 꺾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4-2-4 시스템을 브라질전에 활용했고,  이것은 주효하여 결국 파라과이가 사상 처음으로 코파 아메리카에서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54 스위스 월드컵 때까지 부진이 계속되자 브라질 축구는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전술적인 대안을 마련했다. 

그 전술이 바로 자신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파라과이가 활용했던 4-2-4 시스템의 도입이었던 것이다.

압박추구의 대두

펠레의 출현과  4-2-4 시스템의 성공은 모든 스포츠의 꽃인 58 스웨덴 월드컵을 강타했다.

특히, 홈 대륙에서 월드컵 트로피를 빼앗긴 유럽팀들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이로 인해 당시 세계 축구계는 많은 팀들이 4-2-4 시스템의 활용과 더불어 브라질의 ‘밀라드루스타일’에 입각한 화끈한 공격축구를 막기 위한 전술 개발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이로서 60년대부터 거친 태클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압박축구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전체적인 압박에 기초한 리누스 미헬스의 토털사커도 이 시기에 고안된 것이다.  그 결과 월드컵 경기당 평균득점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58 스웨덴 월드컵에서 32경기 126골이 터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62칠레 월드컵 대회에서는 32경기 89골이 터졌다. 무려 27골이나 감소한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66 잉글랜드 월드컵대회에서 되플이 되었다. 32경기 89골 지난 대회와 같은 기록 이었다.

실제로 62칠레 월드컵 당시 펠레는 상대의 강압 수비에 막혀 고전하다가 결국 체코와의 예선리그 2차전에서 큰 부상을 당해 잔여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펠레의 부상공백에도 불구하고 4-2-4의 변형인 4-3-3 시스템의 완성과  가린샤, 바바, 아메릴도 등 주요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결국 정상에 서긴 했지만, 66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상대의 강압수비에 완전히 차단되어버린 펠레의 부진으로 브라질은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펠레에게 가해지는 거친 태클과 몸싸움은 많은 축구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66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특히나 유럽 팀들의 강세가 이어졌다.  4강에 오른 모든 팀이 유럽팀 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공격력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거친 태클과 몸싸움을 바탕으로 한 강압 수비는 화려한 기술과 공격력으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던 남미팀들의 몰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골 가뭄의 시대’를 암시했다.

전술혁명의 시기

50년대 까지의 축구 전술은 비교적 단조로웠고, 공격중심 이었다. 단순하고 실용적인 전술의 활용과 선수들의 화려한 개인기가 그라운드를 장악했다.  하지만 WM, 더블 M 시스템의 시대가 가고 4-2-4 시스템의 성공 이후 60년대에 이르러 오늘날 유행하는 전술적 모태가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유동적인 공격수들을 제압함과 동시에 공격력을 끌어올린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사커’가  60년대 초, 중반에 이르러 고안되었고, 수비 전술의 명가 이탈리아의 카데나치오 역시 에레라의 출현과 함께 이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브라질이 4-2-4의 변형인 4-3-3시스템을 유행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롱패스 게임’스타일이 램지의 4-3-3시스템에 입각한 전술과 융합되며 이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축구의 4대 스타일 즉 ‘해피 고 럭키’ , ‘롱패스 게임’ , ‘카데나치오’, ‘토탈사커’ 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가히 ‘전술 혁명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전술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60년대가 현대화의 진행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해외스포츠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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